문화 중개인이 되고 싶다
콩고인 폴과 약속했던 대로 밴쿠버 다운타운에 아프리카 사무실을 따로 열었다. 2001년 가을이 무르익고 있을 무렵, 나는CIAI(Centre of Integration for African Immigrant) 비영리단체를 만들었다. 폴은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자기네 국민들을 위해 무조건적인 사랑을 보여 준 한국사람인 나에게 “김옥란을 만나기전은 지옥, 만난 후는 천국”이라고 표현하곤 했다.
그런 폴을 보자 약 20년 전 시내버스 안에서 들은 한 일본인에 대한 라디오 방송 내용이 떠올랐다. 부자였지만 겸손하고 검소해 덕망이 높던 교수는 정년 퇴임을 하고 큰 회사의 명예 이사로 들어가게되었다. 그날은 바로 취임식날, 일본에서 내로라하는 부자들과 유명인사들이 식장에 모여들었다. 최고급 승용차들이 줄줄이 입구에 늘어섰다.
그러나 이날의 주인공인 교수는 지금껏 끌고 다닌 아주 낡은 고물차를 몰고 식장에 들어가려 했다. 그러자 수위가 막아섰다.
“오늘은 명예 이사님의 취임식이 있으니 이런 차를 끌고 들어 갈수 없어요.”
제지당한 교수는 차에서 내려 수위에게 공손하게 인사를 하면서말했다.
“내가 바로 그 자리에 취임을 하는 사람이오.”
나는 그 방송을 들으면서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굳혔다.
사업을 확장시키면서도 순간 순간 알지도 못하는 한 일본인 교수를 떠올리며 ‘검소하게 살아야겠다’고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나는 곧 아프리카 사람들을 한데 모으는 일에 착수했다. 폴에게먼저 브리티시 컬럼비아주에 있는 아프리카 사람들의 연락처를 일일이 알아내도록 지시했다. 그리고 그들이 자신에게 맞는 직업을 찾을 수 있도록 이력서를 만드는 일부터 도와주라고 했다. 또한 직원을 채용하고자 하는 회사들의 웹 사이트나 인력 자원관리 관청에 소개하도록 했다.
폴은 눈물을 흘리며 낯선 타국 땅에 자기네들을 위한 사무실이생긴 것에 대해 감격해 했다. 사실 아프리카 사람들의 캐나다 생활은 우리보다 훨씬 열악했다.
캐나다 정부에서 주는 최저 생계비로 생활을 해나가고 있는 그들의 처지를 도저히 모른 척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폴에게 그의 이름으로 된 명함과 한 달짜리 버스 표를 주었다. 폴은 기대대로 열심히 일했다. 콩고 사람들을 시작으로 우간다, 가나,나이제리아, 수단, 에티오피언 등으로 그 활동 범위를 빠르게 넓혀갔다.
나는 또 폴에게 정부에 보내는 편지를 쓰게 했고, 정부측에서 하는 모든 모임에 꼭 참석하도록 지시 했으며 아프리카 사람들을 알리도록 했다.
지금 김옥란 한 개인이 아프리칸들을 돕고 있는데, 정부 차원에서 우리를 좀 지원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이 편지로 인해 나는 그이듬해 5월, 정부 측과 함께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한 세미나’를 열었다. 주제는 ‘직업 찾기’였다.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밴쿠버에서는 쉽게 보기 어려운 아프리칸을 한꺼번에 그렇게많이 본 것이 신기했다.
박수 소리와 함께 만삭이 된 내가 연단에 나가 인사말을 했다. 나는 자리에서 힘겹게 일어나 ‘할 수 있다’ ‘하면 된다’ ‘하자’라는 구호와 함께 그들에게 연설을 했다. 그들의 순진한 눈동자를 보니 눈물이 핑 돌았다. 기회가 오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인데 아직 기회가닿지 않아 마음 고생을 하고 있는 그들에게 조그마한 등불이라도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곳에 온 많은 사람들이 눈가에 눈물이 고였다. 세미나가 끝나자 몇몇 키가 큰 남자들이 나에게 다가왔다. 그들은 좀 멈칫거리더니 이렇게 물어 왔다.
“정말, 하면 될까요?”
“저를 보세요. 그것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고통을 두려워하지마세요.”
“개인적으로 저희들에게 시간을 내주실 수 있겠습니까?
“네에, 그럼요.. 언제든 힘들면 저를 찾아 오세요.”
어느 정도 사람들이 빠져 나가자 나는 내 방으로 들어와 앉았다.
자비브라는 아프리칸 여자가 만삭의 몸으로 내 방문을 열고 들어서는데 아주 슬픈 표정이었다.
”오늘 아침 마지막 빵을 아들에게 먹이고 왔어요”
그녀는 울먹이며 계속 말을 이었다.
“오늘 저녁에 먹을 양식이 없어요. 냉장고에 냉동된 콩이 한봉지있지만 그것으로는 안될 것 같아서요”
나는 할 말을 잃고 가만히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었다. ‘이곳에서이렇게 살아 가는 사람도 있구나’ 마음 속으로 생각하면서 그녀의말이 끝날 때까지 경청했다.
“자녀가 몇 명입니까?” 나는 조심스럽게 여쭤 보았다.
“5명의 자녀가 있고 이번에 6번째 아이를 낳습니다.”
그녀는 남편과 3명의 자녀가 함께 살고 있고, 2명은 토론토에서공부하면서 일을 하고 있다는 거였다. 또한 그녀의 남편은 조금 더나은 일을 위해 정부에서 보조금을 받고 공부를 하고 있는데 2개월후에 끝난다고 했다. 그녀 또한 그동안 임신한 몸으로 다른 집을 돌아 다니며 청소를 했었는데 산달이 되니까 더 이상 일을 할 수가 없어서 그만 둔 상태이고 정부에 보조금을 신청했지만 서류를 이것 저것 해오라 하면서 차일피일 미루다 보니 먹을 양식마저 다 떨어졌
다고 했다. 아침에 일어나서 현기증이 나고 몸 상태가 좋지 않아서세미나에 오지 않으려고 했는데 10살된 아들이 “엄마, 세미나에 참석하세요. 혹시 하나님께서 도와주실지 모르니까요”라는 말을 듣고나의 세미나에 참석했다는 거였다. 난 그녀에게 내가 가지고 있던200달러를 건네 주었다. 당장 빵과 먹을 것을 사고 나머지는 교회에서 비상음식을 받을 수 있도록 조처를 취했다. 그녀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리고 나서 나는 둘째딸을 낳고 3개월 후에 다시 자비브를 만난 것은 그녀의 아파트에서였다.
나는 먹을 빵과 음식, 어린애가 입을 옷을 가지고 그녀를 방문 했다. 다행히도 정부에서 출산 보조금이 나온다고 했다. 충분하지는않지만 그래도 견딜만하다고 했다. 그 세미나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은 이후에 폴이 있는 사무실로 찾아왔고, 더욱 바빠진 폴은 콧노래를 부르며 기뻐했다. 많은 아프리카 청소년들에게 이력서를 써주고 일을 찾아 주었으며 타지역에서 오는 사람들에게 하우징 알선 등생활정보를 무조건 무료로 제공해 주었다.
폴은 나의 주선으로 정부로부터 3개월 분의 학비를 받고 매니저의 교육을 받았다.
그해 6월 29일 토요일. 나는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한 선상 파티를 열었다. 폴이 앞장서서 홍보를 했고, 나는 거기에 필요한 모든것을 지원했다. 정부측 사람들을 초대하였고 나는 처음으로 배 위에서 아프리카의 살아 있는 음악을 들었다. 괜히 눈물이 나왔다. 나는왜 이다지도 눈물이 많을까. 곳곳에서 눈물을 뿌려 댔건만 내 눈물샘은 마르지를 않았다.
모든것이 싱그러운 여름 7월에는 밴쿠버에 근무하는 우리 전 직원과가족, 폴을 중심으로 하는 아프리카 사람들과 제라코비치에서 야유회를 가졌다. 나는 등이 헐고 닳아서 더 이상 힘이 되어 줄 수 없을때까지 그들의 곁을 지켜 줄 것이라고 다짐했다.
결코 희망의 끈을 놓지 말고 힘들어도 전진하자는 그런 우리가되자고 했다.
나는 2년만에, 울면서 콩고로 다시 돌아 가고 싶다던 폴을 2003년10월 캐나다 우수 시민상을 받게 만들었다. 2년에 한번씩 캐나다 전역을 통해 20명에게 주워지는 이 상은 정부가 인정하는 아주 의미있는 상이기도 하다. 금뺏지와 상패가 주어졌다. 물론 난 그곳에 특별 손님으로 초대되어 갔고 이민성 장관으로부터 상패를 받는 폴을보면서 정말 큰 감격을 느꼈다.
2004년 1월 부터는 몇군데에서 조금씩 보조금이 들어왔고,
2006년 11월부터는 정부로부터 많은 보조금을 받을 수 있었다. 또한 나의 아프리칸을 위한 세미나에 참석했던 이더스 부부가 아프리칸 난민,이민자 어머니들을 위한 비영리 단체(Umoja AfricanCommunity Centre)를 시작할 수 있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해주었다. 나는 아프리칸 난민과 이민자들과 함께 활동해 오면서 BC주에살고 있는 아프리칸 사람들이 우리가 주관하는 행사에 참석하기 위해 자동차로 9시간을 타고 온 사람들도 보았다. 에디오피아어로 발행되는 신문(암하릭어)에 ‘김옥란’이 어떻게 이곳에서 아프리칸 사람들을 돕게 되었는지에 대해 기사가 나왔고 불어 신문에도 보도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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