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 그렇게 될 것이라고 자기 최면을 걸었다.
새해 첫날, 나는 최수희 아주머니 집으로 들어갔다. 나의 정식 직업 명칭은 ‘리브 인 케어 기버(Live in Care Giver)’ 였다. 흔히 ‘내니(nanny) 라고들 했다. 굳이 우리말로 풀면 ’상주 가정부‘라고 할수 있다.
반찬을 못 만들어서 3일 만에 쫓겨난 내가 다시 그 집으로 들어갔던 사연은 이랬다. 내가 네스브리지에 가 있던 한 달 동안 그는한국인 할머니를 고용했다. 그러나 그 할머니는 반찬은 잘 만들었지만 행동이 느리고 매사에 깔끔하지 못해 불만을 샀다. 따라서 반찬은 못 만들지만 부지런하고 깔끔한 내가 차라리 낫겠다고 생각하고있던 차에 때마침 내가 전화를 건 것이었다.
이미 워킹 비자를 신청하기 위한 전제 조건 중 하나인 스폰서가되어 준다고 약속을 했기 때문에 나나 최씨 아주머니나 서로 최선의방법을 선택한 셈이 되었다.
최씨 아주머니의 집은 1월 중순경, 버나비에서 밴쿠버로 훨씬 큰집으로 이사를 했다. 내가 일하게 될 집은 태어나서 그런 집은 처음볼 정도로 웅장하고 화려했다. 나에게는 궁궐과 다름없었다.2층에는 안방과 아이들 방이 있었다. 각방에는 욕실이 따로 붙어있었다. 계단을 따라 1층으로 내려오면 넓다란 생활 공간이 보였다.
그 중간쯤에는 그랜드 피아노가 놓여 있고, 오른쪽으로는 우리의 서재와 같은 집무실이 따로 있었다. 또 그 옆으로 식당과 거실이 큰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거실의 크기가 얼마나 큰지, 이쪽에서 소리를 질러도 저쪽 끝에서는 들리지 않을 것 같았다. 급경사의 계단을 타고 지하실로 내려오면 세탁실과 노래방, 그리고 기계실이 있었다. 내 방은 그중에서도 한구석에 있었다.
집이 크면 클수록, 화려하면 화려할수록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만큼 많았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일들이 주렁주렁 걸려 있었고, 발을 옮길 때마다 일들로 거치적거렸다.
이사 온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정리 정돈할 것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1년 동안 비어 있던 집이어서 거미줄이 여기저기 쳐져있고 먼지투성이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되자 손님들이 거의 매일같이 들이닥쳤다. 그들이 모두 떠난 심야에 나는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무거운 식기들을 정리해야 했다. 주인 아주머니는 수시로 인터폰을 통해 나를 불러 올렸다. 19개월 된 둘째 딸을 살피는 것도 내몫이었다. 아이를 등에 업고 지하실에 있는 대형 냉장고에서 반찬거리를 꺼내 와 아주머니를 위한 아침을 차린 후 곧바로 진공 청소기를 들고 구석구석을 청소해야 했다. 주인 아주머니는 가끔씩 이렇게도 주문하곤 했다.
“카펫을 호텔처럼 깨끗하게 청소해요.”화장실 바닥도 그랬다.
“절대로 얼룩이 져서는 안 돼요.”
이미 청소를 한 그곳을 몇 번이나 손가락으로 직접 문질러 보고는 이렇게 명령했다.
“다시 닦아요.”
나는 아주머니가 서 있는 앞에서 다시 화학 약품을 사용해 고급타일 바닥을 닦았지만 그것을 얼룩 하나 없는 거울로 만들기란 여간힘든 일이 아니었다. 그녀는 먼지에 대해서 지나치게 예민하게 반응했다.
“먼지 알레르기가 있어서 말이야.”
그래서 집 구석구석, 심지어 높이 매달려 있는 샹들리에 전등까지 손가락으로 훔쳐 보았다.
“다시 닦아요.”
다림질하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부잣집이어서 그런지 이들 식구들은 청바지는 물론, 팬티와 러닝셔츠마저도 다림질해서 입었다. 땀을 뚝뚝 흘리며 다림질을 하고 있는 나를 보고 주인 아주머니는 이렇게 주문했다.
“미스 김, 다림질은 일이 모두 끝난 후에 하세요. 그 일은 TV를보면서 쉬엄쉬엄 할 수도 있는 일이니 그걸 일이라고는 생각하지 마세요.”
주인 아주머니의 끝없는 주문에 나는 소의 탈을 뒤집어쓴 사람처럼 말없이 일을 했다. 세상에 나처럼 일하는 사람이 또 있을까 하는생각도 들었다. 나는 그것을 숙명처럼 여기며 감내했다. 워킹 비자때문이었다.
주인 아주머니는 원래 좋은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주머니는 고생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모르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자라났을 뿐 아니라 결혼 후에도 자기 손으로 직접 험한 집안일을 하지 않았다. 그런 입장에서 자신이 시키는 일의 넓이나 깊이가 어느 정도인지 알수 없는 것은 당연한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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