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 오 케" 오늘의 연재 (8) 총명하고 예쁜 세 언니 이야기

연재/기획 / 이현진 기자 / 2025-01-26 10:53:48
1장 눈물도 투지도
어머니로부터 받았다

둘째 언니는 있어도 없는 듯 없어도 있는 듯 늘 안정적이고 편안한 느낌을 주었다. 언니가 초등학교를 졸업할 때 그녀의 총기를 누구보다 아끼던 담임 선생님이 엄마를 찾아와 “꼭 중학교에 진학시켜야 합니다”하고 신신당부를 했을 정도로 공부도 잘했다. 결국 엄마는 둘째 딸을 야간 중학교에 보냈다. 비록 생선 궤짝을 하루 종일나르는 입장이지만 파릇파릇 돋아나는 새싹을 아예 밟아 버릴 수 없다는 생각을 한 것이었다. 그녀는 자신의 인생을 스스로 개척해 나
갔다. 당시 유행하던 편물을 배워 읍내에 가게를 열었다. 모두가 칭찬하는 예쁜 규수였다. 그는 월남전에 참전했던 씩씩한 남성과 결혼을 했다.
젖을 뗀 나를 업어서 키운 셋째 언니는 현명한 여자였다. 집안 형편상 자기까지 공부를 하기가 어렵다고 판단한 언니는 일찌감치 미용 기술을 배우기 위해 고향을 떠났다. 그녀는 막 생기기 시작한 미용 고등학교에 들어가 자립을 위한 실질적인 기술을 익혔다. 이후남다른 성실함으로 자신의 가게를 차리는가 하면 언제나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아버지와 엄마, 큰언니와 큰오빠를 둘러싼 슬픔의 그림자를 지켜 보아온 나로서는 셋째 언니가 자신의 삶을 주도적으로 개척해 나가는 것이 무척 자랑스럽기만 했다.
언니의 상경은 내 마음에 서광처럼 느껴졌고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갔다.서울로 가면 뭐든지 더 큰 희망이 보일 것 같았고 그래서 이삿짐을 싸고 있는 언니 곁에서 떠나질 않고 도와 주었다. 역시 언니는내 기대만큼 자신의 삶을 개척해 나갔고 내가 서울로 거처를 옮겨가
는 가장 큰 동기와 힘이 되었다.
다섯 자매 중 가장 예쁘고 감수성이 뛰어났던 내 바로 위의 넷째언니는 나와는 4살 터울이다. 넷째언니는 늘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는 ‘스타’였다.
그래서인지 똑똑하고 자존심이 무척 강했다. 그러나 내 부러움의대상이었던 언니의 인생은 나에게 심한 상처와 울분을 안겨 주었다.
동생인 내가 봐도 언니는 참 고왔다. 하얀 언니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한 송이 수선화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넷째 언니는 여자로서 내가 닮고 싶은 표본과 같았다.
어렸을 적부터 언니는 내 곁에 있었다. 섬으로 간 엄마를 기다릴때도, 방구석에서 주워 온 돌로 공기 놀이를 할 때도 늘 내 상대는넷째 언니였다.
언니는 배고파하는 나를 실컷 먹여 주기까지 했다. 그는 공깃돌을 떡으로, 맹물을 사이다로 만들어 내는 재주가 있었다. 비록 소꿉장난에 불과한 놀이였지만 신기하게도 언니의 한마디 한마디에 꼬르륵거리던 내 배가 이내 포만감에 젖곤 했다.
그러던 언니와 나는 아쉬운 작별을 해야 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언니는 광주에 있는 인쇄 공장에 경리로 취직이 되었다.
언니가 그곳으로 가던 날, 나는 하얀 블라우스와 치마를 입고 다소곳하게 앉아서 일하는 언니의 모습을 떠올리며 즐거워했다. 당연히언니는 그 공장에서 제일 예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언니가 돈을 많이 벌어서 나를 광주로 데리고 가 주기를 바랐다.
당시 사춘기에 접어든 나는 내 주변 환경에 진저리를 치고 있었다.
나는 집이 싫었다. 녹동이라는 마을도 싫었다. 비린내 나는 생선장수, 기침쟁이 딸이라고 놀려대는 친구들이 보기 싫었다. 매일 아침 학교 가기 전 시장에 들러 언니가 싸 준 도시락을 엄마에게 건네주는 것도 싫었다. 학교가 파하면 시장으로 달려가 생선 궤짝을 들고 엄마를 따라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다. 심지어 매일 기침만 해 대는 엄마도 보기 싫었다. 그런 의미에서 언니는나의 희망이었다.
나는 언니의 광주행을 앞두고 매일 매일 기도했다.
내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광주에서 작은오빠가 하는 일을 돕고있을때였다. 당시 나는 혼자 자취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어느날 저녁,넷째언니가 불쑥 내 방으로 찾아왔다.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언니는 여행 가방을 들고 있었다. 직장을 그만두었으니 당분간내 방에서 생활해야겠다고 말했다. 언니는 무척 초췌해 보였다. 하지만 그냥 그러려니 했다. 저녁은 어떻게 했느냐는 물음에 언니는힘없이 대답했다.
“나 좀 잘래.”
언니는 꼬박 이틀을 죽은 듯이 잤다. 입고 온 옷을 그대로 걸친채였다. 사흘째 되던 날, 밤늦게 돌아와 보니 언니는 불도 켜지 않은 채 벽에 힘없이 기대어 멍하니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언니에게 뭔가 아주 좋지 않은 일이 생겼다는 것을 느낄 수있었다. 나는 그날 비로소 언니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었는지 알 수있었다. 언니의 몸은 상처투성이였다. 구석구석에 시퍼런 멍이 들어있었고, 어떤 부위는 퉁퉁 부어올라 보기에도 끔찍할 정도였다.
나는 언니를 흔들며 다그쳤다.
“왜 이래? 누구야?”
언니는 그저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들릴 듯 말 듯한 소리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나는 치가 떨렸다. 울음도 나오지 않았다.
도대체 누구에게 이 사실을 알려야 한단 말인가? 누구의 얼굴도 떠오르지 않았다.
이튿날, 나는 언니가 다니던 회사로 전화를 걸어 언니와 가까웠던 여직원을 찾았다. 그리고는 그녀로부터 모든 이야기를 들을 수있었다.
언니가 다니던 회사의 사장 아들이 언니를 좋아했다. 그는 언니의 환심을 사려고 애썼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그의 접근은 매번 차단되었다. 언니의 거절이 거듭되자 “만나 주지 않으면 죽이겠다”는 협박으로 이어졌다. 언니는 직장을 잃지 않기 위해서 그의 행패를 참으려 했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그의 행패는 더욱 광기를 띠게 되었고, 끝내 심한 폭행을 당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언니는 더이상 버틸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직장을 포기하고 나를 찾아 온
것이었다.
나는 분노로 몸을 떨었다. 두려움도 잊은 채 이를 악물고 복수를하기 위해 그를 찾아 나섰다. 오빠에게 며칠간 휴가를 얻었다. 아무것도 들리지도 않았고 보이지도 않았다. 나 스스로 그를 처벌하리라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그 누구의 도움도 필요 없었다. 경찰에 신고할 까닭도 느껴지지 않았다. 나는 그와 마주치는 순간 내 손으로 처단해 버리겠다는 각오로 그의 행방을 쫓았다.
마치 수사관처럼 행동하던 어느 날이었다. 그의 꼬리는 서울 근교에서 잡혔다. 지하철 안에서 마침내 그를 찾아낸 것이었다. 그는지하철에서 내리자마자 어디론가 바삐 걸어가고 있었다. 나는 터질듯 고동치는 가슴을 억누르면서 뒤를 밟았다. 그러나 미행의 거리가길어지면서 심한 불안감과 회의감이 동시에 밀려왔다.
‘설사 분풀이를 한다고 해서 나아질 게 무엇인가?’
그 역시 후회할 짓에 다름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그렇게 갈등하는 동안, 집중력을 잃게 된 나는 그만 그를 놓치고 말았다. 복수의 칼은 그렇게 허망하게 끝나고 말았다. 용서하는 것이 가장 큰 복수라고 스스로 위로했다.
언니와의 자취 생활은 너무나 힘들었다. 퇴근 후 방에 들어서면언니는 불도 켜 놓지 않은 채 컴컴한 방 한쪽 구석에 죽은 듯 기대앉아 있곤 했다. 말이라도 시키면 침을 뱉고 헛소리를 해댔다.
나는 굴곡 많은 가족들의 삶을 통해 많은 것을 배웠다. 그들 한사람 한 사람을 떠올리면 언제나 눈물부터 솟았다. 하지만 그 눈물을 넘어서면 ‘이제 내가 그들을 보살펴야 한다’는 투지가 솟구치곤했다. 비록 자기 앞의 현실을 풀기 위해 뿔뿔이 흩어져 살았지만,나는 그들을 생각하며 스스로를 담금질 해 나갔다

 

킴오케 오늘의연재  관련 상담문의 조윤수 010-2844-0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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