면하지 않는다
눈물이 볼을 타고 내려 할머니에게 떨어지게 할 수가 없었다. 병원복도로 나오자 억지로 참았던 슬픔이 한꺼번에 밀려왔다. 서러움이한순간에 분출되듯 치밀어 올랐다. 나는 주변을 의식하지도 않고 엉엉 소리를 내며 복도를 이리 저리 걸었다.
‘할머니를 어떻게 보내 드려야 하나? 안 돼. 할머니께서 가시면나는 어쩌라는 말이야? 다시 고아가 되어 방황의 아픈 골짜기를 헤매야 한단 말이야?’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두려움과 슬픔이 닥쳐왔다. 마치 미친 사람처럼 더 이상 나는 어디로 발을 옮겨야 할지 몰라 우두커니 서 있었다.
겨우 슬픔을 진정한 후 병실로 되돌아오니 할머니가 눈을 뜨고계셨다. 할머니의 앙상한 손이 조금 떨렸다. 나는 얼른 다가가서 할머니의 손을 잡았다. 할머니는 눈만 몇 번 깜박일 뿐 여전히 말이없으셨다. 이제는 바닥을 드러낼 법도 한데 눈물은 한없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할머니는 아실까? 내가 당신 때문에 얼마나 따뜻하게 살 수 있었는지를. 얼마나 희망에 찼고 또 얼마나 기뻤는지를. 할머니를 보살펴 드릴 수 있었던 기회를 얻은 내가 얼마나 감사하는지를. 사랑이가득하던 할머니의 눈도, 따뜻한 할머니의 미소도 이제는 볼 수 없다는 말인가. 내가 닮고 싶었던 사람, 아름다운 캐네디언, 내 마미,따뜻한 할머니.“제발 돌아가시지 마세요.”
나는 몇 번이고 마음으로 할머니께 부탁을 했지만 이미 내 앞으로 밀려들어 오는 슬픔의 바다를 막아설 수는 없었다.
병실에 함께 입원해 있던 다른 할머니의 침대에는 커튼이 쳐져있었다. 간호원에게 물으니 “오늘 아침에 돌아가셨다‘고 했다.
‘아침까지도 멀쩡해 보였는데...... 죽음은 이렇게 허망하게 오는것이란 말인가.’
삶과 죽음의 갈림길에서 어느 쪽이 선택되든 그것을 아무런 저항없이 받아들이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은 것인가. 고통이 계속되는 것보다는 차라리 죽는 것이 나은 것인가. 그러나 난 할머니를 보내드릴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아 있는 힘을 다해 할머니를 붙들고싶었다.
다음날, 나는 짐과 함께 동부 뉴펀랜드에서 급히 날아온 짐의 형더그를 데리고 아침 일찍 병원으로 달려갔다. 우리를 맞은 할머니는눈을 뜨고 있었다. 할머니는 우리를 일일이 알아보았다. 나는 집에서 따 간 꽃을 화병에 꽂은 후 할머니의 창백한 얼굴을 닦고 틀니를씻었다. 커튼을 활짝 열어 아침 햇살이 병실 전체에 고루 퍼지도록했다. 할머니는 아침으로 나온 수프를 한 숟가락도 들지 못했다.
‘이걸 드셔야 사실텐데.....’몇 번이고 권해 보았지만 끝내 들지 못했다.
비어 있던 옆 침대에는 다른 환자가 들어와 있었다. 나는 병원에더 이상 머물 수 없는 저녁 8시까지 할머니의 일거수일투족을 보살폈다.
할머니는 이미 자신의 죽음을 예견하고 있었는지 이틀 동안 입에물 한 방울도 대지 않고 있었다. 짐은 둘째누나 샤론과 함께 형 더그를 배웅하고, 할리팩스에서 날아오는 큰누나 린을 마중하러 공항에 나갔다. 나만 할머니 곁에 붙어 있었다. 의사가 들어와서 청진기로 할머니의 배와 가슴과 등을 진찰하더니 이렇게 말했다.
“할머니께선 지금 아무런 통증도 못 느끼십니다.”
의사가 나가자 할머니는 힘겹게 말했다.
“나를 좀 일으켜 다오.”
간신히 몸을 추슬러 침대에 앉은 할머니는 한참 동안 창밖을 내다보더니 내게 말했다.
“지팡이를 좀 주겠니?”그리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막내 짐은 어디 갔니? 보고 싶구나.”아니, 할머니에게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는 말인가. 기운을 차리고 계시지 않은가. 나는 기쁨에 들떠 대답했다.
“지금 공항에 갔어요. 곧 돌아올 거예요. 조금만 기다리세요.”
“음..... 화장실에 가고 싶다.”
할머니는 지팡이를 짚고 침대 주위를 서성거렸다. 곧 침대 위로올라온 할머니는 잠시 기운을 차리는 듯했다. 그러나 순간 안색이변하기 시작했다. 갑자기 할머니의 눈이 이상해졌다. 눈동자가 돌아가고 있었다. 나는 급히 간호사를 불렀다. 그러나 그녀는 야박하게도 이렇게 말했다.
“지금 할머니께서 세상을 떠나고 있으니 그냥 보고만 있어요.”죽음의 장막이 할머니께 드리워지는 순간, 나는 의사도 간호사도샤론도 짐도 모두 떠난 병실에서 혼자 할머니의 임종을 지켜보았다.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감정들이 교차되면서 그러나 이대로 그냥 가시면 안 된다는 생각만은 계속되었다. 나는 할머니의 귀에다 대고울먹였다.
“마미, 지금 돌아가시면 안 돼요. 짐이 오고 있으니 얼굴이라도보고 가셔야 해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발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마미, 안 돼요. 이렇게는 안 돼요. 제발.....”
비통함과 안타까움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할머니의 영혼이 천천히 당신의 육신으로부터 떠나는 것이 느껴졌다. 틀니가 몇 번 흔들리더니, 숨을 크게 몰아쉰 할머니는 결국 짐과 샤론, 린이 공항에서 돌아오기도 전에 쓸쓸하게 그렇게 마지막 숨을 거두었다.세상을 하직한 할머니의 얼굴은 조용히 잠을 자는 모습이었다.
돌아가신 할머니의 얼굴을 맞대고 얼마나 울었을까. 나는 병실에서거의 2시간 동안을 꼼짝 않고 그렇게 앉아서 내 서러움의 찌꺼기들을 토해 내고 있었다.
짐 일행이 들어오는 소리가 났다. 그들은 병실에 들어서자마자할머니 자리에 커튼이 드리워져 있는 것을 보고는 자신들에게 닥친 상황을 짐작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대로 할머니의 손을 잡고 있었다. 짐이 내 어깨를 흔들자 나의 서러움이 울음으로 터져 나왔다.그들은 소리를 내지 않고 울고 있었다.“킴, 집으로 갑시다.”샤론이 나를 부축해 일으켜 세웠다. 병실을 나서면서 나는 마음속으로 기도를 했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할아버지를 만나 행복하게지내세요, 마미.
[ⓒ 세계타임즈. 무단전재-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