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 오 케" 오늘의 연재 (32) “지금 당장 짐을 싸서 나가!”

연재/기획 / 이현진 기자 / 2025-02-19 10:06:48
길없는 곳에 길을 만들다

2층에 올라가 아기의 기저귀를 갈면서 투지의 불씨를 다시 지폈다. 주인 아주머니는 셋째 아기를 곧 낳을 예정이었다. 그러면 일이더 많아질 것은 뻔했다. 나는 전의를 다시 한번 다졌다.
‘황소처럼 그저 일만 하면 모든 것이 좋게 되겠지. 다시 한 번 워킹 비자를 시도해 볼 수도 있겠구나.’이런 다짐을 하고 있는데 타이완 친구 그레이스가 전화를 했다.
내일 새벽 YMCA에 있는 수영장에 가지 않겠느냐는 것이었다. 그녀는 수영장에 내 영어 선생님인 웨인도 온다고 했다. 나는 그동안 웨인이라는 남자로부터 한밤중에 전화로 영어를 배우고 있었다. 나는이번 기회에 그를 만나서 고마움을 전하는 것도 괜찮겠다는 생각이들었다. 또한 지긋지긋한 일에서 잠시 동안이나마 벗어날 수 있다는기대감이 있었다.
나는 새벽같이 일어나 수영장에 다녀왔다. 이른 시간이었지만 수영장에는 사람이 제법 많았다. 모처럼 젊음의 활기를 그곳에서 느낄수 있었다. 그레이스와 웨인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7시 30분이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왔다. 일 시작 시각보다 30분 늦은 나는 아주머니의 눈치를 보면서 미친 듯이 일을 했다. 이 자리를 놓치면 워킹비자도 내 생계도 다시 막막해지기 때문에 나로서는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로는 수영장에 나가고 싶었다. 30분 정도 늦는것은 저녁 시간에 그만큼 메워 주면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일단 그 다음날은 수영장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고 며칠 후주인 아주머니가 내 심정을 조금은 이해해 주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걸고 어렵사리 말을 꺼냈다. 그러나 내가 용건을 말하자 아주머니는버럭 역정부터 냈다. 30분 늦은 것에 대해서도 참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주제를 알아야지. 수영은 무슨 수영. 정신 차려, 미스김!”
무척 무안했다. 그렇게까지 나올 줄은 생각도 못했다.
그날 오후, 괜히 미안한 마음에 나는 더욱 열심히 설거지와 청소를 해댔다.
다음날, 나는 내 워킹 비자에 대해서 아주머니와 상의했다.
“다시 한 번 신청해 보고 싶은데, 도와주세요.”
아주머니는 잘라 말했다.
“미안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어요. 새로 올 사람도 스폰서가 필요
하니, 일을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수영장에 가고 싶다고 말한 것이 이런 사태까지 불러올 줄은 정말 몰랐다.
이튿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날 수 없었다. 마음은 일어나야지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이런 식으로 일방적으로 다시 쫓겨나야 하는 내 입장이 쉽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침 9시가 되자 아주머니가 직접 내 지하 방으로 내려왔다.
“미스 김, 지금 뭐 하는 거야? 미스 김이 생각을 잘못하고 있는것 같아.”
나는 말에 뭐라고 대꾸를 해야 하나 한참을 그냥 가만히 있었다.
그런 나를 보고있던 아주머니는 급기야 고함을 질렀다.
“지금 당장 짐을 싸서 나가!”
너무 슬펐다.
“필리핀 아가씨 2명 쓰면 너보다 일을 더 잘할 수 있어.”
그것은 결국 내가 필리핀 가정부 2명을 써야 해결될 일을 혼자해냈다는 것을 의미했다.
‘아, 그랬구나. 그래서 내가 소처럼 일을 했구나.’
사실 그녀가 아기를 낳기 며칠 전부터는 음식만을 만드는 한 한국 아주머니가 출퇴근하기 시작했다. 그 아주머니는 아침에 와서 김치 담그고, 나물 무치고, 생선 굽고, 이름 모를 기름진 음식을 만든후 저녁에 퇴근했다. 아주머니가 가고나면 뒤치다꺼리는 다 내 몫이었다. 하나도 들기 힘든 큰 접시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가뜩이나 힘겨운 일이 아주머니의 출현으로 더욱 많아져 있었던 것이다.
나는 갈 곳도 정해 놓지 못한 상태에서 그 집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내 앞날에 다시 먹구름이 덮치고 있다는 사실에 처참하고 참담했다.
나는 김태식 씨에게 전화를 했다. 그 이외에 달리 손을 내밀 사람이 없었다.
“저..... 쫓겨났어요. 당장 갈 곳이 없어요.”
김씨는 언제나 그랬듯 따뜻하게 나를 받아 주었다. 선뜻 자기네집에서 지내자며 직접 차를 몰고 나를 데리러 왔다. 그는 어깨가 축처져 있는 나를 보며 위로해 주었다.
“걱정하지 말아요.”
나는 주인 아주머니에게 작별 인사를 빠뜨리지 않았다.
“사모님, 안녕히 계세요.”
마지막 인사를 하면서 더 이상 서운해하지도 원망스러워하지도않았다. 어쩌면 더 잘된 일인지 모르겠다는 생각과 내일부터는 그토록 잔인한 노동이 날 기다리지 않겠구나 하는 홀가분한 마음까지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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