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 오 케" 오늘의 연재 (17) 영어, 돈, 시간, 정열, 그 사면초가

연재/기획 / 이현진 기자 / 2025-02-04 09:39:46
내게는 너무 쌀쌀했던
캐나다의 하늘

희정과 나는 내가 다니고 있는 학교와 가까운 곳에 아파트를 렌트했다.
소파,의자,식탁,침대등 값싼 중고품으로 구입해서 아파트를 채우고 둘은 그렇게 자취를 시작했다. 줄곧 온돌 바닥에서만 지내던 나에겐 침대 생활에 익숙해지기까지는 많은 날들을 카페트 바닥과 침대를 번갈아 가며 밤새껏 스포츠를 해댔다. 나의 캐나다에서의 생활은 그렇게 불면의 밤들로 시작되었다.
에드먼턴의 4월은 눈이 내려서 발목을 덮고 말로만 듣던 그 동화속의 한장면처럼 신비함과 깨끗함 그리고 조용함이 한데 어우러지던 그날 아침 에드먼턴에 있는 앨버타대학의 영어반에 배정을 받기위해 그곳으로 갔다. 일종의 배치고사였다.
내가 순번을 기다리고 있는데 옆에서 한 남학생이 말을 걸어왔다. 영어였다. 나는 재빨리 “저 한국사람이에요”라고 대답했다. 그만큼 내게는 영어가 무서운 존재였다. 나는 그와 함께 나란히 앉아서 시험을 보았다. 여느 항목은 대충 넘어갔지만 마지막 시간에 본작문 시험은 그렇지 못했다. 나는 아주 기초적인 표현 몇 마디 외에는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간신히 두어 줄 긁적거려 놓고 멍하니칠판만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옆에 앉은 그 남학생이 그런 나에게 속삭이듯 말을 건넸다.
“옥란 씨, 왜 안쓰고 그러고 있어요?”
힐끔 그의 답안지를 쳐다보니 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나는 너무창피해서 얼굴이 화끈거렸다. 자존심이 상해 그에게 내뱉듯 이렇게대답했다.
“안 쓰는 게 아니라 못 쓰고 있는 거예요.”
나는 물론 기초반이라는 판정이 나왔다. 처음으로 만나 보는 캐네디언 선생님은 말끔한 인상에 너그러운 미소를 지으며 우리반의학생들의 이름을 하나씩 부르면서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물어보고각자 차례대로 자기 소개를 하라는 거였다. 기초반이라고는 해도 처음 며칠 동안은 강의 내용을 제대로 못 알아들어 선생님에게 특별한부탁을 해야 했다. 나와 비슷한 수준의 일본 학생 2명과 함께 알파벳부터 가르쳐 주는 ‘왕기초반’으로 보내 달라고 사정을 한 것이다.
선생님이 주는 숙제조차도 무엇인지를 알아듣지 못할 정도로 내귀는 꽉 막혀 있었다.
그러나 선생님은 2주 정도만 더 다녀 보고 그래도 안 되겠다고판단이 되면 그때 보내 주겠다고 했다. 2주 정도가 지나자 강의 내용이 아주 조금씩 들려왔다. 선생님이 말하는 숙제의 내용도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런 속도로 영어를 습득해 나가다가는 한국을 떠나면서목표했던 2년은 커녕 20년이 걸려도 동시통역사의 꿈은 이룰 수가없을 것 같았다. 한 학기를 보내는 동안 갖고 온 돈은 이미 바닥을드러내려 하고 있었다. 학비,생활비 등으로 목돈이 나가고 나니 남는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2년 안에 동시통역사의 꿈을 이루지 못하면 장기 체류를 해야만 하는데, 그것은 아주 복잡한 문제였다. 한국에서 돈 한 푼 보내 줄 사람이 없는 내 입장에서는 사면초가의 입장에 빠져 드는 것이었다.
영어의 벽을 새삼 절감하면서 혼자 이런 생각을 하고 있자니 결국은 돈과 시간, 그리고 정열만을 소모한 채 아무것도 이룰 수 없을것이라는 절망감이 엄습해 왔다. 등골이 오싹했다. 현실과 이상 사이의 단절감으로 인해 밤을 뒤척이는 날이 늘어났다. 나는 한국에서도 그랬던 것처럼 한밤중에 일어나 노트를 꺼내 내 장단기 목표를다시 정리하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인가 나는 어떤 중요한 생각이 떠오르면 노트를 꺼내 적는 습관을 갖게 되었다. 그것은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게 하고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를 판단하는 데 상당한 도움을 주었다. 물론 나는 노트 속에서 새로운 아이디어를 찾았고, ‘이것이다’하고 판단이서면 머뭇거리지 않고 앞으로 달려나갔다. 그러다가 ‘이것이 아니다’ 싶으면 재빠르게 돌을 던지고는 더 이상 미련을 갖지 않았다.
처음부터 어려움에 빠진 내 유학 생활에 있어서 큰 힘이 되어 준사람은 다름 아닌 배치 고사장에서 만났던 그 한국 남학생이었다.
우연하게 시작된 그와의 만남은 내 초기 캐나다 유학 생활을 지탱해나가는 데 적지 않은 힘이 되어 주었다.
그는 가끔씩 전화를 걸어 방문 의사를 비쳤다.
“밥 좀 얻어먹으러 가도 되나요?”
그가 오는 날이면 왠지 기분이 좋았다. 내가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반찬’이라야 고작 흰 쌀밥과 오이 피클, 그리고 계란 프라이가전부였지만 우리는 마치 며칠 동안 굶은 사람들처럼 맛있게 그것들을 먹어치웠다. 나는 그를 보면서 나와 닮은 점이 참 많다고 느꼈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제법 잘 통했다.
그는 내 정서뿐만 아니라 공부에도 적잖은 자극을 주었다. 그는독일에서 1년 반 동안 공부를 한 사람이어서 독일어를 잘 구사할 수있었다. 그는 독일에서 자신이 어떻게 공부를 했는지를 내게 들려주었다. 처음 독일에 도착했을 때는 단 한마디도 알아듣지 못해 선생님에게 “영어를 몇 마디라도 섞어서 얘기해 줄 수 있겠느냐?”고제의했을 정도였다고 한다.
거대한 언어의 장벽과 맞부딪친 그는 안 되겠다 싶어, 학교에서준 유인물을 무슨 뜻인지도 모른 채 무조건 외웠다고 한다. 다음날학교에서 선생님이 질문을 하면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어제 외운 문장을 통째로 줄줄 외웠다고 한다. 학교가 끝나고 집에 오면 침대와책상만이 있는 작은 방에 틀어박혀 커튼을 내린 채 문장 외우는데만전념을 했다는 것이었다. 잠자는 시간과 밥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하물며 화장실 안에서도 혼신을 다해 독일어를 쓰러뜨리는데 힘을쏟아 부었다는 설명이었다.
그렇게 6개월이 지나자 자신도 모르게 독일어가 입 밖으로 술술나오기 시작했고, 좀 더 시간이 흐르자 그 어떤 외국인보다도 독일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는 내게 당시 자신이 공부하던 노트들도 보여 주었다. 그 노트속에는 글씨뿐 아니라 간간이 그림도 그려져 있었다. 예사롭지 않은솜씨의 그림에는 고층 건물에서 창밖을 내다보는 자신의 뒷모습이나 어두운 터널을 뚫고 기차가 달리는 모습 등이 담겨 있었다. 나는그 그림을 보면서 강인한 의지력의 소유자인 그 역시 무척이나 힘들고 외로운 싸움을 했었다는 사실을 느낄 수 있었다. 언어가 통하지않는 곳에서의 유학 생활이란 그만큼 힘든 일이라는 사실도 실감할
수 있었다.
그해 가을, 나는 그와 많은 얘길 나눌 수 있었다. 앞으로의 계획과 목표, 각자 간직하고 있는 꿈과 희망을 주고받으며 서로를 격려하고 위로했다. 물론 그도, 나도 상대를 이성으로 받아들이지 않고동성의 친구처럼 편하게 대했다. 우리는 서로에게 부담이 없는 동지와 같은 사이였다.
나는 똑똑하고 야무진 그를 통해서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자극을 받을 수 있었다. 우리의 만남은 그가 한국에 들어갔다가 미국으로석사 과정을 공부하러 간다며 에드먼턴을 떠날 때까지 계속되었다.

 

킴오케 오늘의연재  관련 상담문의 조윤수 010-2844-0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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