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의 하늘
삶이 힘들어 쓰러지려 할 때 나를 부축해 준 것은 다름 아닌 곁에있는 사람들이었다. 두 번째 중간 학기가 끝나 가고 있을 무렵, 삶의 무게에 잔뜩 찌들어 있던 내 마음에 봄바람이 불어왔다. 향기가가득 담긴 꽃바람이었다.
어느 날, 내가 다니던 교회에서 깊고 푸른 눈을 지닌 씩씩한 캐네디언을 만났다. 나보다 나이가 어린데도 그를 사모하는 내 마음은주저함이 없었다. 그를 처음 보는 순간, 가슴에는 무어라 표현하기힘든 묘한 힘이 꽉차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너무 좋아 나는 그를똑바로 쳐다보지도 못했다. 태어나서 세상에 그렇게 멋진 남자는 처음 보았다. 그는 한국에서 2년 동안 생활을 한 적이 있어 한국말을곧잘 했으며 예의도 바른 청년이었다.
그럼에도 나는 내 사랑의 감정을 애써 드러내지 않았다. 나이의 차이가 나를 주저하게 만든 것은 결코 아니었다. 인종이 다르다는 점 역시 나를 머뭇거리도록 만든 게 아니었다. 내가 처해 있는 현실이 내삶의 행로를 단단히 붙들어 매고 있었다. 내 처지에 사랑의 감정은 있을 수 없다며 나는 어쩔 수 없이 스스로 이성을 찾으려 노력했다.
내가 가장 견디기 힘들었던 점은 그의 눈빛을 볼 때였다. 그는 언제나 따스한 눈빛을 내게 보여 주었고, 내 마음은 나도 모르게 깊고푸른 그의 눈 속에 빨려 들고 있었다. 나는 그 역시 나를 사랑하고있다는 사실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사랑의 힘은 위대했다. 가장 힘든 시절, 가장 어려운 시간들이었음에도 내 입에서는 콧노래가 절로나왔다. 하루하루가 행복했고 즐거웠다. 그와 함께하는 것 만으로도모든 것을 이겨 낼 수 있었다.
그러나 나의 꿈결 같은 사랑은 그리 오래 가지 못했다. 그는 내게다가올 때처럼 그렇게 조용하고도 자연스럽게 내 곁을 떠나갔다. 아니 그는 애초부터 나를 사랑의 상대자로 생각하지 않았다. 그가 내게 보여준 착하고 부드러우며 예의 바른 행동 하나하나는 그가 지닌품성의 발현이었다. 술주정으로 세월을 다 보내 버린 아버지, 큰오빠와는 분명하게 다른 느낌이었다. 그의 눈빛은 메마른 나의 감정을녹였고, 나는 그것을 사랑으로 착각했다.
사랑의 후유증은 효과를 발했던 그 힘만큼 지독한 것이었다. 잊으려 하면 할수록 그와 함께했던 기억들이 그림자처럼 따라붙었다.
나는 한동안 가슴앓이를 하느라 현실 속으로 다시 헤어나오지 못했다. 나라는 존재는 아무것도 남지 않은 텅 빈 껍데기같이 느껴졌다.
자연 내 삶은 과거의 노예가 되어 그의 흔적에 질질 끌려 다니고 있었다.
실연의 블랙홀에서 좀처럼 빠져나오지 못하는 나를 보다 못한 친구가 어느 날 찾아왔다. 그날도 여느 때처럼 집 앞뜰에 앉아서 멍하니 먼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다. 친구는 이런 나를 위로하려고 자신의 차에 나를 태우고 야외로 나갔다. 친구는 자기 아버지가 사용하는 공기총을 갖고 왔었다. 그는 내게 들판의 곡식을 파먹는 쥐보다
조금 큰 야생 동물인 ‘골퍼’를 향해 쏘라고 했다. 꽉 막혀 있는 내 욕망의 분출구를 그렇게 해서라도 뚫어 주고 싶었던 것이었다. 그러나들판을 울리는 요란한 공기총 소리도 내 마음을 뚫어 내지는 못했다. 난 모든것에 의욕상실증을 나타내고 있었다. 매 시간마다 참을수 없는 무엇인가가 가슴에서 치밀어 올랐다. 이러한 고통의 순간들을 이겨내기 위해 학기 중간이었지만 공부를 잠시 잊기로 하고 에드먼턴에서 만난 친구인 신디와 함께 그녀의 시골 고향인 칼스턴으로갔다. 신디는 자동차를 몰면서 내게 칼스톤에 대한 이런저런 얘길하고 있었지만 내 머리엔 오로지 이 아픈 터널이 빨리 지나가 줬음하는 바램뿐이었다. 에드먼턴에서 자동차로 6시간이 넘게 걸리는 칼스턴은 조그마한 시골 마을이었다. 신디의 집은 언덕위에 있었고 모든 마을이 한눈에 들어왔다. 평화롭기 그지 없는 모습에서 마치 그림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켰다. 나는 도착한 다음날 아침부터 일찍 일어나 뒷밭에 난 잡초도 뽑고 신디 부모님을 따라 이웃집
파티에도 가고 서툴긴했지만 신디 부모님과 함께 잔디도 깎고 들판에 나가 산책도 하면서 에드먼턴의 가슴 시린 추억과 슬픈 추억들을지워 버리러 애썼다.
슬픔의 늪에서 빠져나오는 연습을 그렇게 하면서도 나는 뼛속 깊은 곳으로부터 전해지는 허전함을 감당하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어느 정도 마음의 안정을 되찾아 갈 무렵, 에드먼턴에서 희정의언니인 희연으로 부터 전화가 결려 왔다.
“옥란아, 그 사람이 두 달 후에 결혼을 한단다. 약혼식은 이미 했대.”
차라리 그런 소식이라면 전해 주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그냥 이대로 세월이 흘러서 잊어졌으면 좋았으련만....전화기를
힘없이 놓은 나는 무작정 거리로 뛰쳐 나왔다. 6월의 칼스톤은 천둥과 번개를 동반한 비가 쏟아지곤 했는데 그날따라 비는 더욱 세차게내리고 있었다. 장대비가 퍼붓는 거리를 우산도 없이 미친 사람처럼쏘다녔다. 언덕에도 올라가고, 하늘을 쳐다보며 빗물과 눈물을 함께마셨다. 넋나간 사람이 되어 여기저기 마구 걸었지만 주위의 어떠한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결국 어느 건물 한쪽 구석에 서서 괴로움을 토해냈다.
어둠 속에 잠겨 한 치 앞도 내다보이지 않는 내 앞날이 너무 두렵고 서러워서 더욱 큰소리로 울어 댔다.
내일을 맞는 것이 두려웠다. 한 달을 그렇게 보냈다. 무척이나 긴시간이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정신이 퍼뜩 들었다.
‘내가 가진 것이라곤 시간과 젊음뿐 아닌가?’
이렇게 무작정 죽은 영혼의 소유자처럼 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이전보다 더 큰 투지가 필요했다. 연애를 하러, 결혼 상대자를 만나러 이곳 캐나다에 온 것이 아니다. 공부, 공부..... 영어,영어밖에 내가 선택할 탈출구는 그 무엇도 없었다.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위로했다.
‘그래, 내가 이 낯선 땅에서 좀 외로웠나 보다.’
에드먼턴으로 돌아온 나는 새로운 모습의 사람이 되어 있었다.
조금 더 강해진 나를 내 스스로 느낄 수 있었다. 나는 죽도록 공부에만 몰두했다.
그러나 나에게는 돈도 남아 있지 않았다. 학비가 없어 다음 학기등록을 할 수 없었다. 더 이상 친구들과 함께 학교에서 영어를 배울수 없었다. 나는 단 한 푼이라도 아끼기 위해 1시간 거리에 위치한앨버타의과대학 도서관을 매일 걸어다녔다. 미래의 의사들이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는 것을 보면서 도서관 문이 닫히는 순간까지 공부에 매달렸다. 길거리에서는 이어폰을 끼고 누가 듣는 것도 의식하지않고 큰소리로 따라 했다. 그렇게 나는 그 한 남자로 인해 만들어진
기나긴 터널로부터 벗어나고 있었다.
도서관에서 그의 단짝을 만났을때 가슴이 뭉클하기도 했지만 이내 냉정을 되찾을 수 있었다. 가슴속 한자리에 자리잡은 부끄러움을어찌하기 힘들었지만 그래도 별다른 동요 없이 태연한 척 그와 얘기를 나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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