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킴 오 케" 오늘의 연재 (4) 김삿갓 아버지와 생선 장수 엄마

연재/기획 / 이현진 기자 / 2025-01-22 09:11:21

4살배기 어린 나는 언니들의 손에 맡겨져 하루 종일을 지내야 했다. 엄마는 언제나 땅거미가 어스레하게 깔리는 저녁 시간이면 비린 내가 진동하는 빈 생선 궤짝을 들고 나타났다. 비바람이 기승을 부리는 날에는 집으로 돌아오지도 못했다. 장사하러 나갔던 섬마을에꼼짝없이 갇혀 있어야 했던 것이다. 어린 마음에 엄마와 같이 있고싶어 일 나가려는 엄마의 치맛자락을 붙들기도 했다. 그러나 엄마는 언제나 쓸쓸한 미소만 남기며 서둘러 대문을 나섰다.
내 엄마의 이름은 강애돌이다. 1917년에 태어나 열아홉 꽃다운 나이에 부모님이 정해 준 얼굴도 모르는 신랑과 합방 의식을 치렀다. 아버지는 제대로 배우지 못한 엄마와는 달리 그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사각모에다 검정 교복, 긴 망토를 휘날리며 도쿄 거리를 누비던 앞길이 창창한 조선의 유학생이었다.
아버지는 일본에서 공부를 하며 작은아버지의 사업을 돕고 있었다. 그러나 ‘양쪽 집에서 예물 교환도 끝냈으니 장가 들러 빨리 집으로 오라’는 부모로부터의 황당한 전갈을 받기에 이르렀다. 효자였던아버지는 당신 부친의 뜻을 거역할 수 없었다. 그리고 결혼식 날,난생처음 보는 신부와 신방을 차렸다.
뜻하지 않게 발목이 묶인 아버지의 머릿속엔 ‘언제 어떻게 일본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라는 궁리만 가득 차 있었다. 문맹에다가 무뚝뚝하기까지 한 아내가 당신의 눈에 들어올 리 만무했다. 화려하고세련된 신여성들만을 봐 온 젊은이였다. 결국 더 이상 참다 못한 아버지가 엄마에게 말을 꺼냈다.
“결혼식도 마쳤으니 내 할 일은 다한 것 같소. 일본에서 하던 사업을 계속하면서 가끔씩 고향에 들르겠소.”
그러나 아버지에게 자유와 도전의 기회는 주어지지 않았다. 할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신데다가, 엄마가 첫아이를 가졌기 때문이었다. 졸지에 아내와 집안을 두 어깨에 짊어지게 된 젊은 지식인 가장은 그렇게 주저 앉아야만 했다.
아버지에게 있어 시골 생활은 갑갑함 그 자체였다.
날개가 꺾여 버린 아버지가 그 탈출구로 선택한 것은 안타깝게도술과 방랑이었다. 이루고 싶었던 것이 많았던 아버지는 결국 아무것에도 손을 대지 못했다. 다만 성에 차지 않는 아내와 기대하지 않았던 아이들을 억지로 껴안아야 했을 따름이었다.
아버지를 집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한 엄마의 노력은 눈물겨웠다.
현실에 만족하지 못하는 남편을 대신해 고된 노동으로 가정을 책임져야 했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을 포기하지 않았다. 가장의 역할까지 하며 시어머니로부터 글을 배웠다. 그래서 자신의 무지함을 씻어내려 했다. 남편으로부터 자신이 배척당하는 이유를 당신의 무지라고 여겼던 것이다. 그것만이 아버지를 아이들 곁으로 끌어들이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믿었다.
낮에는 억척스럽게 일을 하고, 밤에는 시어머니로부터 글을 배우는 주경야독의 세월이 이어졌다. 그 각고의 시간들은 결국 내 친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난 뒤, 엄마를 그 당시 동네 아낙네 중 유일한‘지식인’이 되게 만들었다.
그러나 엄마의 이 같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끝내 가족이라는 울타리 안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못다 한 꿈과 열정을 삭이느라 평생을 술과 함께 지냈다. 그는 현실 대신 풍류를 선택했다.
사람들은 그를 ‘녹동 김삿갓’이라고 불렀다. 일본어뿐 아니라 한문에도 능했던 아버지는 주변 사람들에게 한시를 써 주곤 했다. 타고 난 문학가적 기질로 시를 읊으며 자신의 인생를 위로했다. 물론그끝은 언제나 비탄이었다.
회한과 미련 속에서 살던 아버지는 내가 만 4살이 되던 해에 이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아버지가 나에게 시킨 딱 한 가지의 일은 술심부름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나는 술을 받으러 갔다. 막걸리 주전자를 나는 곧바로 아버지에게 갖다 드리지 않았다. 이까짓 술이무엇이기에 아버지가 그토록 좋아하는지 알고 싶었다. 나는 집 뒤뜰로 가서 그것을 마셔 보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술에 취해 쓰러져 자던 나를 발견한 것은 일을 마치고 저녁 늦게 귀가한 엄마였다. 뒤뜰에 쌓아 둔 짚단밑에서였다. 술 받으러 간 막내딸이 돌아오지 않자 아버지는 나를찾아 나섰지만 나는 동네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아버지는 내가 받아 온 마지막 술을 마시지도 못한 채 숨을 거두고 말았다. 내가 엄마에게 안겨 방으로 들어왔을 때,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당시 아버지의 나이는 55세였다.
엄마는 속이 무척 따뜻한 사람이었다. 어느 춥던 겨울날, 시장에서 일을 마친 엄마는 한 남자 아이를 데리고 왔다. 눈이 산처럼 쌓이던 추운 날이었는데, 그 아이는 신발조차 신고 있지 않았다. 서너살 정도로 짐작되는 그 아이의 발은 갈래갈래 트고, 손은 퉁퉁부어있었다. 몹시 아파 보였다. 원래 말을 못하는 것인지 안 하는 것인지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그 아이는 엄마의 손을 꼭 잡은 채 오들오들 떨며 부엌 앞에 서서 나를 우두커니 쳐다보고 있었다. 아이의
옷에서는 흰 가루 같은 것이 묻어 있었다. 모두 이였다.
엄마는 펄펄 끓는 물을 솥에서 퍼낸 다음 찬물을 섞어 그 아이를씻겼다. 쩍쩍 갈라진 까만 손을 물속에 담그자 그 아이는 몸을 움츠리고 얼굴을 찌푸렸다. 몹시 쓰라린 듯했다.
두 언니들은 그런 광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불쌍하게 느껴지면서도 그런 낯선 아이가 우리 집에 같이 있다는 사실이무서워 울었다. 엄마는 딸들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아무런 말도 하지않았다.
다음날, 엄마는 우리에게 “쟤를 이틀만 더 재우고 보내자”고 말했다. 엄동설한에 시장 바닥을 맨발로 헤매고 있는 아이가 너무 불쌍해서 데리고 왔다는 것이었다. 엄마는 정말 이틀 후에 그 아이를 데리고 나섰다. 아무리 불쌍해도 그 아이를 맡아 키울 힘이 엄마에게는 없었다. 그래서 더욱 안됐는지 엄마는 그 아이의 머리를 자꾸만쓰다듬었다. 아이는 엄마의 손을 잡고 나가면서 우리 쪽을 몇 번이고 뒤돌아보았다.
그 아이의 눈 속에는 불안의 그림자가 가득했다. 이름도 모르는아이의 눈빛을 보면서 왠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제발 우리 집에서 하루라도 빨리 나가 줬으면... 그러던 내 자신이 무척 죄스러웠고 참았던 눈물이 뺨을 타고 내리는 것을 느낄 수있었다.
‘저 아이 손발은 이제 다시 쩍쩍 갈라지고 피가 나겠지.’나는 엄마를 보면서 일찌감치 내가 가질 수 있는 것과 갖지 못할것에 대해 선을 그어 구분하는 법을 터득했다. 아울러 기회가 오기
를 기다리는 인내심도 배웠다.
나는 엄마의 삶을 통해 강인함도 배웠다. 엄마는 단 한 번도 자식들 앞에서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렇게 어린 시절을 보냈으므로가난으로부터의 탈출을 꿈꾸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므로 스스로 운명을 개척해 나가지 않으면 안 된다는 다짐을 풀무질 할 수 있었다.
물론 좀처럼 바깥으로 드러내지 않아 더욱 따스했던, 남을 사랑하는마음도 엄마로부터 배울 수 있었다.
태풍으로 돌아오지 못하는 엄마를 기다리다 바닷가에서 서로를부둥켜안고 울던 어린 자매들.
“내일이면 바다가 잠잠해질 거야. 그러면 엄마가 돌아올 거야.”그렇게 서로 위로하던 어린 자매들. 나는 그 어떤 사람보다 가난했지만, 누구보다 진한 혈육의 정을 간직하며 자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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