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날짜가 정해지면서 나는 영어 공부에 다시 몰입했다. 영어가 안된다는 이유로 떨어지면 그것처럼 내가 못나 보일 수가 없을 것 같았다. 화장실에 가서 외우고, 밥 먹으면서 외우고, 아이 기저귀를 갈면서도 외웠다. 그리고 마침내 인터뷰를 하러 추운 겨울날새벽 길을 나섰다. 인터뷰는 밴쿠버와 가까운 미국 워싱턴 주 시애틀에 있는 캐나다 대사관에서 있었다.
다행히 나는 한국에서 캐나다로 오기 전에 5년짜리 미국 비자를받았었다. 인터뷰 약속 시각은 오후 2시였다. 그러나 새벽에 일어나길을 나섰음에도 길을 잘못 들어 2시 30분 정도가 되어서야 도착했다. 이미 조금 늦겠다고 양해를 구해 놓았기 때문에 괜찮았다. 캐나다 대사관으로 들어가는 길에서도, 엘리베이터 안에서도, 문을 열고사무실로 들어가면서도 내 마음은 초조하고 불안하기 그지 없었다.
나를 맞은 여자는 미세스 머피라는 여자였다. 안경 너머로 나를쳐다보는 그녀의 눈빛이 차가웠다. 극히 사무적이고 딱딱한 그녀의태도에서 나는 불길한 느낌마저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미세스 머피는 몇 마디를 묻고는 이렇게 선언했다.
“당신에게는 워킹 비자를 줄 수 없어요.”
온몸에 힘이 빠졌다. 모든 희망이 땅바닥에 내동댕이쳐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멍해진 나는 그곳을 어떻게 빠져나왔는지 모를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그녀는 내가 뭐라고 해명을 하려고 하자 말문을 막고서는 자리를 떠버리는 것이었다.
‘이럴 수가. 가정부 일까지 마다하지 않고 했는데.... 이럴 수가.... ’
돌아오는 차 안에서는 망연자실 창밖만 내다보았다.
‘이제 어떻게 할까?’
나를 캐나다에 머물게 해 주던 학생 비자의 유효 기간이 끝났다.
나는 급히 방문 비자를 신청했다. 방문비자의 결과를 가슴 졸이며기다리던 날, 나는 이민국으로부터 무지막지한 통보를 받았다. 15일후엔 캐나다를 떠나라는 거였다. 이유는 통장에 돈도 없고 돌아갈비행기 표가 없다는 것이었다. 강제 출국 명령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왜 이렇게 안 풀릴까. 나라는 인간은 되는 일이라고는 하나도 없구나.’
나는 발등에 떨어진 불 때문에 거의 냉정을 잃고 있었다.
‘안 된다. 이 상태로는 한국에 갈 수 없다. 절대로..... 밴쿠버 이민국에서 날 쫓아 낸다면 다른 앨버타주로 가자. 혹시 그곳에서는나에게 방문비자를 연장해 줄 수 있을지 모른다.’
나는 에드먼턴으로 가는 가장 빠른 교통 수단을 찾았다. 일하는집에 지장을 최소화하기 위해서는 하루 만에 에드먼턴을 다녀와야했다. 그것은 비행기였다. 그러나 비행기표를 살 돈이 없었다.. ‘내
주제에 비행기는 무슨, 얼어 죽을.....’
다음 선택은 고속버스였다. 밴쿠버에서 에드먼턴까지는 약 17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나는 이틀이면 되겠구나 생각하고 터미널로 달려갔으나 그마저도 이미 당일 편은 떠난 뒤였다. 마지막으로남아 있는 것은 야간열차. 하루가 꼬박 걸려야 했다. 그래도 하룻밤을 새는 것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나는 조각나고 있는 희망의 파편들을 주섬주섬 주워 작은 가방안에 넣고 밤 8시 야간 열차를 탔다. 그리고는 이튿날 밤 8시에 에드먼턴 역에 도착했다. 나는 곧장 앨버타대학 도서관으로 갔다. 대낮같이 환히 밝혀진 그곳에서 나는 하룻밤 신세를 질 병애 언니가 집으로 돌아올 시간까지 기다렸다. 밤늦게까지 공부하는 학생들과 함께 밝은 불빛 아래서 공부를 하고 있으니 이상하게도 내 마음에 평화가 밀려왔다.
이대로 죽어도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마음이 편안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깨자마자 씻고 집을 나섰다. 이민국으로 가서 여권과 서류를 들이밀었다. 담당 직원은 단정한 인상의 젊은 남자였다. 나는 그에게 또박또박 지금의 내가 처해 있는 상황과 내가왜 캐나다에 더 머물러야만 하는지에 대해 설명했다.
워킹 비자를 위한 인터뷰를 했고, 그것이 잘 안되어 지금은 다시신청할 준비를 하고 있다는 사실까지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러니까 방문 비자로 연장을 해 달라는 부탁까지 했다.
마음속에서는 조바심이 치밀어 올랐지만 그러면 그럴수록 담담하게 보이려 애를썼다. 간단한 질문 몇 개를 던진 후 그 직원은 내처지가 너무 딱해 보였는지 체류 기간을 3개월 연장하는 도장을 찍어 주었다. 이민국을 걸어 나오는 나를 향해 내리 쬐는 아침 햇살이따스하게 느껴졌다. 낭떠러지까지 떠밀려 온 나에게 3개월이라는기간은 무엇이든 한 번 더 시도해 볼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나는 병애 언니한테 고맙다는 전화를 한 후 밴쿠버행 기차에 몸을 실었다. 열차 밖으로 보이는 설경과 스쳐 지나가는 풍경들이 눈에 들어왔다.
밴쿠버의 내 골방으로 돌아온 나는 무릎을 꿇고 한참이나 생각에잠겼다.
‘그래, 나는 어떤 난관이라도 이겨 낼 수 있다. 결코 두려워하지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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