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나다로 돌아오는 길도 순탄치가 않았다. 이번에는 시애틀에서밴쿠버로 가는 막차인 밤 9시 버스를 놓치고 말았다. 대합실에 멍하니 앉아서 주변을 보니 배낭을 맨 젊은 여행객들 몇 명이 바닥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었다. 여관에 들어갈 돈이 없었던 나로서는 대합실 의자에 앉아 밤을 꼬박 새웠다.
첫차가 출발하는 새벽 6시까지 1시간이 남아 있을 즈음, 중국인몇 사람이 대합실로 들어 오더니 나에게 다가왔다.
“밴쿠버로 가나요?” 그들 중 한 사람이 내게 물었다.
“네, 그런데요?” 내가 대답하자 그들은 뒤에 서 있던 할머니를 내앞에 세우고는 이렇게 말했다.
“밴쿠버까지 좀 부탁합니다.”
“그렇게 하시죠.”
내가 얼떨결에 대답하자 그들은 잠시 자리를 지켰다가는 훌쩍 떠나 버리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영어를 한마디도 못했다. 내가 그나마 아는 몇 마디의 중국말을 다 해 버리니 그 이후엔 아무런 의사 소통도 안 되었다. 눈치와 손짓 발짓을 동원해 가면서 할머니와 얘기를 하다 보니 버스가 다가왔다. 나는 버스가 시애틀 시내를 벗어나고속도로에 접어들자마자 곯아 떨어졌다. 정신없이 자고 있는데 버스는 어느새 국경검문소에 도착해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서 중국인 할머니 때문에 작은 소동이 벌어졌다.
중국말을 할 수 있는 세관원이 없어서 나에게 통역을 도와 달라고부탁을 해 왔다. 나는 “중국말을 못한다”고 했으나 그들은 내 말을듣지 않았다.
“아무래도 당신이 보호자인 것 같은데, 일단 사무실 안으로 들어오세요.”
그들은 할머니에게 어디를 얼마 동안의 일정으로 왜 가는지를 묻고는 내가 그 의사를 할머니에게 전달해 주기를 기다렸다. 나는 손짓 발짓을 동원해 의사를 전달하려 별수를 다 써 보았지만 할머니는눈만 멀뚱멀뚱 뜨고 있었다. 난감했다. 순간 나는 아이디어 하나를떠올렸다. 그것은 내가 갖고 다니던 한영사전이었다. 그 안에 있는한글 단어에 괄호가 쳐진 한자가 씌어 있다는 것이 떠올랐다. 나는그것을 펼쳐 할머니에게 ‘숙박’, ‘전화’ 등의 단어를 보여 주었다. 할머니는 금세 의미를 알아차리고는 글을 썼다. 간단한 입국심사는 그렇게 통과가 되었다.
밴쿠버에 사는 할머니의 아들과 통화까지 한 세관원들은 그 아들에게 영어를 한마디도 못하는 할머니를 한 번만 더 혼자 여행을 시키면 캐나다에 들어오지 못하게 하겠다고 경고를 했다.
할머니와의 인연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다시 출발한 버스는내가 표를 끊은 목적지인 뉴웨스트민스터 정류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내가 그곳에서 내리니까 중국인 할머니도 따라 내렸다.
미국 시애틀 고속버스 정류장에서 할머니의 보호자로 보이는 중국인이 나에게 ‘밴쿠버로 가느냐’고 물었었다. 밴쿠버는 10여 개가훨씬 넘는 위성 도시로 구성되어 있어 그 안의 어떤 도시에 산다고하더라도 통상적으로 ‘밴쿠버에 산다’고 대답을 한다. 광역 밴쿠버의 도시 중 하나인 뉴웨스트민스터에 내리는 나 역시 대합실에서“밴쿠버에 간다”고 대답했고, 이를 들은 보호자들이 할머니에게 “무조건 이 여자를 따라 내리면 아들이 마중 나와 있을 것”이라고 단단히 일러둔 것 같았다.
나는 몇 번이고 할머니를 버스 위로 올려 보내려 했으나 할머니는 내 허리춤을 놓지 않았다. 할 수 없이 운전 기사에게 가서 전후사정을 설명하고 다시 태워 줄 것을 요구해 간신히 할머니와 떨어질 수 있었다. 버스에 강제로 올려진 할머니는 불안한 표정으로 손을 흔들며 작별 인사를 해 주었다.
오전 9시 30분, 뉴웨스트민스터 버스 정류장 작은 대합실에 나는혼자 앉아 있었다.
전날, 밥을 굶어 가며 꼬박 버스 대합실에서 지샌 내 몸은 이미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내 짐을 갖고 있는 트레이시는 일을 하고 있을 시간이었다. 트레이시 오빠 집의 열쇠가 없는 나로서는 그녀의 일이 끝나는 5시까지갈 곳이 없었다. 눕지는 못하더라도 어디엔가 등이라도 기대고 싶은마음이 간절했다.
대합실에서 쓰러질 듯 앉아 있는데 어떤 젊은 남자가 내게 다가와 물었다.
“어디 아프세요?”
무거운 고개를 들어 올려다보니 방금 타고 왔던 버스의 건너편의자에 앉아 있던 베트남 남자였다.
“아니에요. 좀 피곤할 뿐입니다.”
나는 그렇게 대답하면서 왜 이곳에서 이러고 있어야 되는지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을 했다. 그는 이렇게 제안했다.
“그러면 우리 집에 가서 좀 쉬고 가실래요?”
당시 나에게는 그 남자를 의심해 보거나 자존심을 세울 기력이남아 있지 않았다.
그 상황에서 그런 것을 생각한다는 것은 사치에 불과했다.
나는 곧장 그를 따라나섰다. 그의 집에는 아내와 서너 살 되어 보이는 아들, 그리고 처제가 있었다. 나는 부끄러움을 잊은 채 그의 아내가 가져다 주는 음식을 먹고는 소파에서 그대로 곯아 떨어졌다. 얼마나 정신없이 잤을까 트레이시가 나를 찾아오는 소리가 났다. 베트남 남자는 다행스럽게도 좋은 사람이었다. 나는 이후 그들에게 그때의 고마움을 전하고 싶었으나 도저히 집을 기억해 낼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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